성철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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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 (19012년 1세 ~ 1940년 29세)

작성자
admin
작성일
2020-04-28 04:26
조회
424
 
 
생애 1 (19012년 1세 ~ 1940년 29세)

1912년 (1세, 壬子)

음력 2월19일 (약력 4월6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목곡리에서 아버지 율은(栗隱) 이상언 (李尙彦 1881-1959) 


어머니 강상봉(姜相鳳 1893-1957)의 4남4녀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 어머니가 스님을 임신하고서는 문밖 출입을 삼가고 모난 음식을 먹지 않는 등, 온갖 정성으로 태교하였다고 전한다.

1920년 (9세, 庚申)

4월 단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입학하시기 전에 서당을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6(15세, 丙寅)

3월 단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다. 진주중학교 입학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신체검사에서 탈락하다.
원래 몸이 약했던 스님이 이 무렵부터 요양차 대원사에 드나들었다.

1931년(20세, 辛未)

대원사에 드나들며 불교에 빠질 것을 염려한 집안에서 결혼을 서두르다.
11월 이덕영(1909-1982)과 혼인신고

1932년(20세, 壬申)

12월2일 간례휘찬(簡禮彙纂)에 이영주 서적기를 남기다.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장자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기독계의 신구약성서, 자본론, 유물론 등, 동서고금의 철학에 관한 책 약 70여권의 제목이 적혀 있다. 20세를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다.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 스님의 증도가를 읽고 밤중에 햇불을 만난 것 같았다고 회고하였다. 잡지 불교를 통해 화두 공부를 익히고 대원사 요양 중에 서장(책)을 보다.



1935년 (24세, 乙亥)

이 무렵 대원사 탑전에서 화두참구하며 42일 만에 동정일여의 경지에 이르렀다.
대원사가 해인사에 연락하여 환경스님(1887-1983)의 제자 최범술(효당스님, 1904-1979)이 대원사를 방문하다.
최범술의 권유로 스님이 해인사를 가다.

1936년(25세,丙子)

1924년에 선원으로 확장된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정진하다.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주지 이고경(李古鏡, 1882-1943) 스님의 호의로 정진을 계속하다.
해인사에 강의하던 강사 김범린(1899-1964)이 교학 연구를 권하다.

3월3일 범어사 조실 하동산(河東山, 1890-1965)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출가하다.

     

    彌天大業紅爐雪 미천대업홍로설 이요
    跨海雄基赫日露 과해웅기혁일로 라
    誰人甘死片時夢 수인감사편시몽 가
    超然獨步萬古眞 초연독보만고진 이로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 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홀로 걸어 가노라.

동산스니을 따라 범어사로 옮겨 범어사 금당선원에서 하안거를 나다. 동산스님은 해인사 조실로 옮기고 스님은 범어사 원효암에서 동안거를 나다 (조실 용성스님) 동안거 기간인 11월18일(음 10월16일) 용성(1984-1940)스님이 동산스님에게 계맥을 전수하는 자리에 스님도 함께 하다.

1937년(26세, 丁丑)

3월 15일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다.
범어사 원효암에서 하안거를 나고 용성스님을 시봉하였다. 용성스님은 그 무렵 어떤 스님을 보아도 스님이라 하지 않고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손자인 성철스님에게만은 “성철수좌” ”성철스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울 대각사로 옮겨 가실 때에 꼭 스님을 데려가겠다고 했지만, 스님은 부산역까지만 배웅하고 도망쳤다는 일화가 있다.
통도사 백련암으로 옮겨 동안거를 나다. 조실은 향곡스님의 은사인 운봉(雲峰. 1889-1946)스님

1938년(27세, 戊寅)

범어사 내원암(1900 개설)에서 하안거 (조실 하동산)을 나고 통도사 백련암에 동안거를 나다.
이 무렵까지도 어머니가 철마다 옷가지와 음식 등을 마련하여 찾아 왔으나 계속 물리치다.

1939년(28세, 己卯)

금강산 마하연에서 동안거를 나다.
마하연선원은 1926년 재정 사정으로 문을 닫았다가 1932년 59칸짜리 당우를 짓고 다시 개원하였다.
1933년에는 입방규칙을 제정하여 자격을 갖춘 납자만 결제대중으로 받기로 하였다. 1939년 3월29일에는
선리참구원에서 전국수좌대회를 개최하여 금강산 마하연선원을 초학(初學)수좌 지도를 위한 모범선원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워낙 규모가 커서 안거를 나는 대중들도 서로를 잘 몰랐다고 한다.

마하연에서 평생의 지기인 자운스님을 만나다.
글을 모르는 대중스님들의 부탁으로 편지를 대독하고 대필해주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찾아 왔으나 만나지
않다가 대중공사를 통해
금강산 유람을 기켜드리기도 했다.

1940년 (29세, 庚辰)

금상산 마하연에서 하아거를 나다.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오도송(悟道頌)을 읊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 장좌불와를 시작하다. 은해사 운부암에서 동안거를 나면서 단식 정진하다.

悟道頌

   黃河西流崑崙頂 (황하서류곤륜정) 하니
   日月無光大地沈 (일월무광대지침) 이라
   遽然一笑回首立 (거연일소회수립) 하니
   靑山依舊白雲中 (청산의구백운중) 이로다

   황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지는 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자료출철 한국 성철닷넷

http://sungchol.org/home/bbs/board.php?bo_table=01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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