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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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2 (1946년 35세 ~ 1966년 55세

작성자
admin
작성일
2020-04-28 05:01
조회
470
생애 2 (1946년 35세 ~ 1966년 55세

1946년 (35세, 丙戌)


"송광사에서 방부를 드리려다가 생식을 이유로 거절당하다.
송광사에서 일타스님을 만나다. 도우스님과 성전암으로 옮겨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이 무렵 청담스님이 봉암사에서 봉암사 주지의 요청으로 봉암사로 옮기다.
청담스님이 홍경, 종수스님 등과 봉암사에서 새로운 불교를 모색하다가 해인사에서 가야총림이
개설된다는 소식에 스님과
청담스님이 해인사 측의 최범술, 환경스님(당시 주지)를 만났으나
재정문제가 걸려 타협이 결렬되다.
가야총림 방장에 효봉스님을 추대하고, 우봉스님은 총림에 합류하다.

 

1947년(36세, 丁亥)

총림건은 청담스님에게 일임하고 도우스님과 통도사 내원암으로 옮기다.
청담스님이 하안거에서 가야총림에 합류하다. 김범룡 거사에게 불서룰 기증받기로 약속하고 해제하면 봉암사로 옮기기로 하다.
가을에 봉암결사를 시작하다.
기본적으로는 성철, 청담, 자운, 우봉스님 네 분의 구상으로 진행된 봉암사 결사는 공주규약을
체결하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목표로 하였다. 청담스님의 추천으로 봉암사를 정하고, 처음에는 성철, 자운, 보문, 우봉스님 네 분이 시작하였다. 청담스님은 가야총림 때문에 뒤늦게 합류하였다. 향곡(香谷), 월산(月山), 종수(宗秀), 도우(道雨), 보경(寶境), 법전(法傳), 성수(性壽), 혜암(慧菴)스님 등 20명으로
구성되어 신장 등을 없애고 장삼과 가사, 발우 등을
정비하였으며, 신도에게 3배와 보살게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중국 총림의 일과에 맞게 생활하고, 대불정능엄신주를 독송하도록 하였으며, 대부분의 사찰에서 하고 있는 예불문을 완성
하였다.
교단 정화는 물론 주요 인물들이 조계종의 요직을 맡으며 종단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47년 (36세, 丁亥)

봉암사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김범룡거사에게 불서를 기증받고 봉암사 극락전에 모시다.

1949넌 (38세, 乙丑)

봉암사에서 하안거를 나다.
빨치산이 출현하여 정진이 어려우므로, 경남 월내리의 묘관음사로 옮기다. 김범룡 거사의 불서도 묘관음사로 옮겼으며, 이후 계속 거처를 옮길 때마다 불서를 옮기다.

1950년(39세, 庚寅)

청담. 법전스님 등이 봉암사를 나오면서 봉암사 결사가 무산되다.
경남 고성군 문수암에서 청단, 법전 등과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1951년 (40세, 辛卯)

경남 통영의 안정사 운봉암에서 하안거를 나다.
모이는 사람들이 늘자 안정사 주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정사와 운봉암 사이에 초가삼간의 토굴을 지어 천제굴이라고 이름하다, 주로 시봉은 법전스님이 맡다.
천제굴에서 비로소 신도들에게 3천배와 아비라기도를 하게 하다.


1952년 (41세, 壬辰)

천제굴에서 하안거를 나다.
천제굴에서 머무시는 동안 청담, 자운, 운허, 향곡, 서옹스님등이 다녀가다. 천제굴이 협소해 비구니 스님들이 성철스님이 수행할 수 있도록 성주사를 내주어 경남 마산의 성주사에서
동안거를 나다.


1953년 (42세, 癸巳)

천제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1954년 (43세, 甲午)

천제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비구종단의 정화(정화)가 시작되다.

1955년 (44세, 乙未)

파계사 한송스님의 초청으로 파계사 성전암으로 옮기시려다가, 건물 보수를 위해 법전스님이 먼저 수리를 하고, 스님은 임시로 남해의
용문사 백련암에 머물다.
9월 비구측이 19개 사찰의 관리권을 접수하면서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운스님이 취임(1955-1957 7월)하다.
가을에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망을 두르고 1964년까지 10년간 두문불출하며 외부의 출입을 막다. 이것을 흔히 “10년 동구불출”이라 하다.
동구불출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책을 읽으며보내다. 일본의 남전대장경은 물론 영문잡지와 다양한 분야의 신종 서적을 섭렵하다.

1957년 (46세 丁酉)

파계사 성전암에 동구불출하다.  다시 해인사의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청담스님 이 취임(1957년8월-1960년5월)하다.

1964년 (53세, 甲辰)

동구불출을 마치고 부산 다대포에서 잠시 머무르시다, 서울의 도선사에 머물다.
도선사는 1961년에 청담스님이 주지로 취임, 오랜시간 꿈꾸어 오던 승가대학을 실현하기 위해 실달학원(悉達學園)을 열고, 실달학원시행요강을 마련하다. 청담스님과 서문을 쓰다.
이 무렵 청담스님과 함께 각각의 시자 천제스님과 혜성스님을 데리고 북한산, 남한산성, 화엄사지 등을 순례하다.





4월30일 동산스님이 입적.
1967년에 세운 동산스님 사리탑 비문을 짓다.
경북 문경의 김룡사(金龍寺) 조실로 머물다.
9월1일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의 13일간의 구도행각 중에 김용사를 방문하여 3000배를 시키고, 9월2일부터 이틀에 걸쳐 “불교의 근본사상인 이변(離邊) 중도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에서의 우주의 실상, 우리가 이 실상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방법론” 등을 현대학문의 반증을 들어 설법하다.

1966년 (55세, 丙午)

1월8일(토, 음 12월7일)부터 2월20일(일, 음 2월1일)까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를 상대로 50일 안거정진을 지도하다.
참가자는 광덕스님을 지도법사로, 박성배를 지도교수로 한 봉은사 입시생인 전창열, 김금태, 이진두, 김기중, 황귀철, 김선근, 이철교
스님의 강론내용은

1. 불교의 생명은 각()에 있다.
2.
불교 근본원리로서의 중도사상
3.
돈오점수설 비판.
4.
현대과학과 불교의 합리성

4월 스님의 발원으로 1965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한 선방 상선선원을 준공하다
8월3일부터 8월24일까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봉은사의 입시생 중심) 구도법회를 지도하다.
참선정진을 중심으로 하고, 20일간 반야심경으로 시작하여 육조단경,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 등의 경론과 중도법문을 하다. 이것을 “운달산법회”라고 하며, 최초의 대중설법
으로 기록된다. 가을 무렵 자운스님의 권유로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 동안거를 나다.
구도법회 참가자 일부가 스님을 따라 백련암으로 옮기도 출가하다.
11월6일 월정사 대웅전 상량식에 참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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